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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시선으로 바라본 12세기 고려의 외교노선

카뮈의 시선으로 바라본 12세기 고려의 외교노선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철학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실존주의 사상가인 알베르 카뮈는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그의 철학을 시작한다. 그가 발견한 것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열망과 그에 침묵하는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대립이다.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명료한 인식관을 위해 어떤 사실은 받아들이고 어떤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이런 심리작용은 본능적인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언젠가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는 순간 큰 혼란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부조리다.

부조리함은 삶의 의미를 제시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지만 인간의 열망과 세계의 침묵간의 대립은 결국 인식적 충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덕에 생각보다 다양한 상황에서 부조리함을 연상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인간 이성의 정수로서 ‘믿어야 하는 것’인 과학조차 사실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가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닫고 나면 부조리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의 철학에 의하면 부조리를 마주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대응은 부정, 회피, 대면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부조리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도피적인 태도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인데, 카뮈는 이를 보다 직설적으로 종교에의 귀의나 육체적 자살로 설명한다. 반면, 대면이란 부조리를 삶의 일부로 인정하면서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반항적 태도로서, 이것이야말로 카뮈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이다.

전통적인 고려-여진의 관계

당나라는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유형의 제국이었다. 강성한 군사력으로 세를 크게 넓혔을 뿐만 아니라 3성 6부제, 율령과 같은 통치체제, 그리고 유, 불, 도교 삼교로 대표되는 국가이념까지 당나라의 주요 문물을 주위로 성공적으로 전파시켜 동아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고려의 국가적 자부심은 기본적으로 중세 다극 체제와 해동천하관, 불국토사상에서 나오고 있었지만, 중국의 선진 문물을 잘 수입해서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는 문화적 성취감에서도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여진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여진은 말갈로부터 유래한 민족으로 이미 한 번 고구려에서 한민족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과거가 있는 종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대 고려의 관점에서 문화적 상징성을 찾아보기 힘든 야만인이었다. 여진 대표의 호칭은 추장(酋長)이었고, 고려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향해 내조하거나, 귀부하거나, 조공을 하러 오는 한 단계 아래의 대상이었다. 일례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여진을 향해 “북번(北蕃)의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멸칭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 위계에 대한 인식은 여진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고려를 고구려, 발해와 관련된 상위 문명으로 인정하고 자신들 스스로를 번(蕃)으로 표현하는 외교적 수사를 구사했다.

이 관계는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발해의 멸망 뒤 여진은 요의 일원으로 복속되어 있으면서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며 국경 무역을 통해 생필품을 조달받거나 고려로 귀화하여 관직을 받는 등, 고려의 문명권 아래에서 보호와 통제를 받는 변방의 존재로 머물러 있었다. 고려 역시, 이러한 여진과의 비대칭적 관계를 국경의 안정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 국가 내 해동천자관의 정당성을 달성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금나라 건국과 고려의 동요

12세기 초 고려 인종의 치세는 고려사에서 주의깊게 들여다봐야 하는 시기다. 그가 군주로 있을 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권력의 대립이 여러 형태로 출현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 정치지형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송의 책봉 제의와 가도 요청, 황주첨의 칭제건원 요청 등의 작은 사건을 제외하고 당시 고려 내외에서 일어난 주요 정세변화를 순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연도주요 사건
1109년고려의 여진 정벌이 실패로 종결된다.
1115년여진으로부터 금나라가 건국된다.
1116년고려가 요 연호를 사용 중지한다.
1122년고려 인종이 즉위한다.
1125년요나라가 북송과 금에 의해 멸망한다.
1126년고려가 금나라에 칭신한다.
1126년고려에서 이자겸의 난이 일어난다.
1127년북송이 금에 멸망한다.
1135년고려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난다.
1142년고려가 금 연호 사용을 시작한다.

그의 치세가 고려 전성기의 연장선에 놓여있었음을 생각하면, 금나라에 대한 사대는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귀부해왔던 오랑캐에 대한 칭신이라는 점에서 큰 인식 변화를 요구하는 어려운 결정이었고, 고려 내부의 입장도 우리도 황제국을 선포하고 금나라 정벌을 준비해야 한다는 서경 문벌귀족의 주장과 지금 우리 국력이 여의치 않고 지금 금나라가 강대하니 우리가 금나라에 칭신해야 한다는 개경 문벌귀족의 주장으로 나뉘었다.

어떤 입장이 정치적으로 옳은지와는 별개로 1126년 당시에는 실권을 쥐고 있던 이자겸이 금나라에 대한 자의적인 칭신을 결정했고, 인종이 이를 받아들이며 황제를 향한 표문이 보내졌다. 곧 이자겸이 축출되지만 외교노선은 수정되지 않았고, 야만인이라며 무시해 왔던 여진에 대한 사대라는 점에서 15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으나 끝내 1142년 고려 왕이 금나라에 책봉되며 고려는 공식적으로 금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 갑작스러운 정치적 흐름은 고려의 해동천자관을 위협함에 따라 정치적 갈등을 촉발했으며, 서경 천도 운동에 이어 묘청의 난이라는 극단적 형태의 반발로 이어졌다. 다만 묘청의 난은 단순히 전통과 자주성을 지키려는 움직임만은 아니었으며, 그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정치적 지형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1127년 정치적 거물 척준경을 유배보내는 과정에서 그 빈자리를 정지상을 구심점으로 하는 서경의 정치세력이 가져가게 되었고, 인종 또한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개경 문벌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로 이들을 우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경파가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 등 현상 타파를 통한 급진적 진취주의 노선을 제시함에 따라, 현상 유지를 통한 실리적 현실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던 개경파와는 대립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정치 노선의 차이를 넘어 서경파는 풍수지리와 불교적 신비주의를, 그리고 개경파는 합리주의적 유교 사상을 앞세웠고 이 상황은 두 정치세력의 이권투쟁이자 국풍파와 한학파의 이념갈등, 불교와 유교의 대립양상으로까지 비화한다.

이 긴장 상황은 서경파의 이름으로 계획되지 않은 반란이 일어나고, 진압되면서, 종료됐다. 결과적으로 고려의 헤게모니는 개경의 정치세력이 가져가게 되었고 권력균형은 붕괴했으며 서경의 지위 또한 격하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잘 알고 있는 실리적 사대주의와 유교적 보수주의, 삼한 계승 의식과 같은 사상은 이 때 경쟁자의 소멸을 계기로 공고화되었거나, 적어도 초석이 자리잡은 것이다.

두 사상에 대한 개인적 평가

12세기 고려가 마주한 상황은 과거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한 자주국가로서의 존엄성과 자부심을 지키고 싶다는 인간적 열망과, 과거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족이 그 믿음을 비웃듯 세운 강력한 금나라, 그리고 이러한 현실로부터 발생한 내부적 정치갈등을 모두 보여준다는 점에서 국가적 차원의 거대한 부조리였다. 카뮈의 관점을 빌린다면, 이 상황을 두고 당시 고려의 주류 정치 세력이었던 서경파와 개경파의 엇갈린 대응은 다음과 같이 다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경파의 주장은 금나라 정벌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세계의 침묵에 대한 부정이나 반항으로 볼 여지도 있지만, 대중과 왕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한 공식적인 논리는 불교와 풍수리지 등 신비주의에 기반한 희망이었고 그들의 운동은 그 믿음 없이 성립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자살에 가깝다. 특히 서경으로 천도하여 궁궐을 지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감정적으로는 통쾌할지 몰라도 부조리를 이성으로 인식하고 그 안에서 싸우는 대신 또 다른 비합리로 부조리를 덮어버리려는 시도였다.

반면, 개경파의 주장은 금나라 정벌이라는 감정적 호소나 맹목적 믿음에 의존하는 대신 굴욕적인 현실을 국가 존속을 위한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 외교적 긴장 관계 해소와 같은 실리를 추구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이는 부조리를 부정하거나 도피하는 대신 그것을 인간의 조건으로 끌어안는 태도였으며, 부조리와 대면하며 자신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반항적 인간의 모습에 가깝다. 그것은 분명 철학적 성찰 이전에 기득권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만, 500년 뒤 병자호란에서 유사한 딜레마가 재현되었을 때 척화파의 강경 성향이 주류가 된 결과가 어땠는지를 생각한다면, 개경파가 제시한 요지는 부조리에 맞서기 위한 인간의 유일한 무기인 이성을 붙잡으려는 시도의 일환으로서 이해하더라도 큰 위화감은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역사에 만약은 없으므로 어느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다만 이 일련의 사건이 있었던 직후 1170년 의종 대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때문에, 만약 국가 운영철학이 정상적으로 유지되었다면 고려가 금나라에 대해서 어떤 외교노선을 취했을지, 내부적으로 어떤 담론이 오갔을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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