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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더 담백했던 영화 〈룩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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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간만에

우연히 알게된 멋진 작화의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영화관을 찾았는데 90분가량의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솔직하게 나는 이 영화가 그림을 소재로 하는 소소한 이야기라서, 그것도 눈에 띄게 좋은 작화로 그려져 있어서 좋았다.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낀 적 있을 재능있는 또래를 향한 동경심이나 질투심, 훼손된 자부심, 그리고 나름의 노력으로 빚어낸 성장기의 성취감이 세밀하게 담겨져 있었고, 정밀한 심리 풀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창작욕구와 경쟁심리를 힘껏 자극했다.

인상깊었던 것은 영화가 정보를 표현하는 과정이다. 〈룩 백〉은 의미를 한 번 확인하고 나면 더이상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붙이지 않는다. 영화의 이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후지노와 쿄모토의 뒷모습을 반복하는 방식일 텐데, 예를 들면 후지노가 그림에 대한 열의는 후지노의 모습을 잠깐 비추고 나머지는 집안 방과 거실, 학교, 도서관 등을 후지노가 교차하는 공간과 그 공간이 계절에 따라 서서히 변하는 모습, 그리고 그 사이 그림 연습장이 하나 둘 쌓이는 장면을 몽타주로 엮었다. 같이 작품을 만들기로 한 후의 후지노와 쿄모토, 쿄모토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후지노 또한 같은 연출을 인용해 표현했다.
그 시크한 태도 덕에 영화는 간결해졌고 이해하기 쉬워졌다. 후지노와 쿄모토가 자신들의 만화가 잡지에 실린 것을 확인한 직후 터지는 즐거운 육성, 집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쿄모토의 독백을 이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일상적인 대화는 그 내용을 명시적으로 들려주는 대신 공간 밖에서 인물을 비추는 것으로 끝낸다. 단조로웠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되려 수려하고 영리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있다. 이를테면 다른 시간대의 후지노가 학창시절의 만화 작품을 찾아볼 때 세네개로 분할된 화면이 시간차를 두고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 순으로 하나 둘 재생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연출은 그들이 만드는 컷 만화를 모방한 듯 눈으로 만화를 읽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전달한다. 〈룩 백〉은 이렇게 중요한 장면은 고민이 담긴 연출로 전달하고 구체적인 서술이 필요없는 장면은 과감히 건너뛴다. 그 과정에서 간혹 발생하는 공백은 정교한 화면구성과 화려한 OST가 대신했다.

영화가 극중 인물을 유난히 성심성의껏 다루고 있다고 느낀 것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룩 백〉은 집과 작업실에서 후지노의 발 떠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작품을 처음 기고하고 받은 돈으로 시내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보여주는 식의 소소한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은”이라는 전제와 “두 소녀”라는 개념 모두 잊지 않고 구체화한다.
이것이 가장 잘 나타난 장면은 단연코 후지노가 빗길을 힘차게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제 그만 그릴 때도 되지 않았냐”라는 말로 동력을 잃고 소멸된 후지노의 만화에 대한 열의는 쿄모토의 “당신은 만화 천재에요”라는 말에 단숨에 회복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하교길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밞으며 전력질주하는 최대한의 과장된 동작으로 멋지게 표출된다. 동적인 리듬감과 카메라 움직임, 특유의 거칠거칠한 작화로 구성된 이 멋진 장면은 차후 후지노의 특출난 스토리텔링을 동경하던 쿄모토가 그의 손을 잡고 합류하거나, “배경 미술의 세계”을 접하고 후지노의 손을 놓기 시작함에 따라 두 소녀의 관계가 절묘한 선 위를 걷기 시작할 때 미묘한 매력을 더한다.

logo-light logo-dark 〈룩 백〉, 원문 로고

〈룩 백〉은 단편 영화로서 그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나오는 자만과 질투, 성장, 그리고 의미는 사라지고 형태만 남은 삶의 씁쓰름함을 잘 표현한 영화다. 57분의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포착할 것이 많은 정성어린 작품이었고, 영화를 보는 잠시 일상을 환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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