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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만들어나가고 있는 인문학적 관점 몇 가지

최근 만들어나가고 있는 인문학적 관점 몇 가지

스스로 제시하는 좋은 아비투스 활용법 4.13

다원주의와 일원주의

진영의 우열을 나누고 열등한 쪽을 배제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집단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제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는 다짐과 함께 국제연합 헌장에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을 명시했고, 이는 다원주의와 정치적 이상주의가 현대 사회의 토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세계 여러곳에 민주주의 사회가 찾아왔다. 사회는 탈권위화되었고, 일원주의적 사고관은 점차 자연스럽게 후퇴했다. 다양한 행위자를 존중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자는 다원주의는 근대사의 강력한 교훈으로서 일상생활에도 큰 호소력이 있고, 앞으로의 입지도 확고해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글이 있었다. 출저가 어디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예술에 몸을 담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분야에 대해 뭐가 나쁘고 뭐가 좋은지 정도는 마땅히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라는 논지였다. 한마디로, 여전히 좋은 건 좋은 것이라는 일원주의적 주장이었다. 문제는 설득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에 대한 차이를 애써 무시한다면 더 나은 작품을 발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가치판단의 중요성보다 가능성과 균형을 우선시하는 다원주의는 오판일까?

나는 이 충돌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성질과 환경은 분리되어 있다. 어떤 성질이 가치있는지는 환경이 정하는 것이고, 환경이 변한 정도에 따라 기준 또한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기준은 개인이 놓인 환경을 따른 해석일 뿐이므로 잠재력과 가능성 자체는 넓게 열어둘 필요가 있다. 즉 다원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냄새이든 향기이든

아비투스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처음 제시한 것으로 유명한 이 개념은 개개인의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 또는 무의식적 성향을 의미하는데, 사실 이 용어는 그보다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리만큼이나 긴 요트를 가졌다고 해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살롱에 초대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아비투스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기도 하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다 한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난과 촌스러움을 벗어던지고 여유있는 품격을 쟁취할 수 있는지는 그 사람의 또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투스는, 그 존재만으로 개개인의 태생을 판결하는 냉혹한 해석이면서 동시에 계층이동에 대한 열망을 코를 찌르듯 강렬하게 자극하는 잔인한 소재다.

그렇지만 아비투스는 사회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유효하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앞서고 싶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 왕실의 후손으로 길러지지 못한 아쉽다”, “또는 열악한 빈민층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나의 아비투스를 객관화하고 그 외연을 확장하고 싶다. 까다로운 식사예절, 절박한 생존 전략, 또는 중산층의 평범한 고민을 경계심 없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포용력으로 나중의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싶다. 이는 앞선 다원주의의 영향이다.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소모적이다 4.15

발해사 귀속논쟁

698년 대조영에 의해 당의 안동도호부가 축출되고 발해가 건국된다. 발해는 한민족 역사의 한 갈래로서 고구려 계승을 표방했으며, 해동성국을 이룰 정도로 강성했지만 끝내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한다.

우리는 위와 같이 발해를 기억한다. 대중적인 인식도 그렇고, 한국 역사학계 또한 발해의 문화유산에서 고구려적 요소가 상당수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중국의 의견은 다르다. 중국의 대중 인식은 약하게는 발해가 말갈족의 나라였다는 것이고, 강하게는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 의견 역시 발해가 속말말갈의 나라였으므로 중국사라는 것이 중론이다.

중국 동북공정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시대상황 탓인지 발해에게서 당나라와 말갈, 고구려적 요소가 모두 발견되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당대 주변국의 인식 또한 일관되지 않았다. 고려가 발해를 동일계통의 친척국가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지만, 구당서는 발해를 “고려별종의 국가”로, 신당서는 “속말말갈의 국가”로 기술했고 이 기록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 논쟁이 되고 있다. 당분간 양쪽 모두 납득할만한 타협안을 제시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발해를 중국사로 취급하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동북공정의 연장선으로 느껴져 불쾌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학계의 입장은 완고하며 중국 입장에서는 역으로 한국이 발해를 무리하게 한국사로 편입시키려 하는 것처럼 비춰질 것이다. 이것은 어느 쪽이 옳은지와는 별개의 일이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

첫 여요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서희와 소손녕이 만났을 때, 소손녕이 고려가 신라의 후계이라고 주장하자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며 완고히 맞선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국이라는 것은 당대의 보편적 관념이 아니었으며 이를 자처하는 고려의 증명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는 관념을 주변에 성공적으로 전파했고, 천 년 넘게 그렇게 인정되었다. 심지어 고구려와 고려를 국성만 교체된 연속체로 바라보기까지도 했다. 그런 전통적인 역사관을 수정하여 고구려사와 고려사를 별개의 국가로서 분리하고,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 시도하기 시작한 것은 오늘날 중국이 정치적 사정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중국의 주장이 왜 자국민을 설득할 최소한의 파급력은 지니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은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아주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말선초가 역사의 한 연속이듯 나말여초 또한 역사의 한 연속이었다. 소손녕의 주장대로 고려의 강역은 고구려와 매우 달랐으며, 좋든 싫든 고려는 정치적, 문화적 관점에서 신라의 유산을 물려받은 국가였다. 중국은 이 점에 주목한다.

물론 고려는 고구려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른 나라 역사학자들의 관점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평양 등 통일신라가 장악한 고구려의 핵심 지역으로부터 발원한 고구려 유민 세력이 고려를 세운 주체였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도 대륙의 중화민국과 타이완 섬의 중화민국, 튀르키예와 오스만 제국, 고대 이스라엘과 현대 이스라엘 등이 서로 다른 실체적 요건을 지니지만 각각을 전신으로 하는 후신으로 인정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나라를 건국한 주체의 성격이 계승의식, 주변국의 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역사적 해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상속 질서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이것은 인류학자 유발 하라리가 본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거침없이 지적하듯 결국 허구 위의 이야기이다. 국가, 민족, 역사와 같은 개념을 들춰본다면 우리의 머릿속에서나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을 인식한다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다. 고구려사나 발해사를 어느 한 쪽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억지다. 고구려사는 고구려사고, 발해사는 발해사다. 아니, 당대의 일은 당대의 일이다. 현실적으로 바라보더라도 명분으로 실리를 밀고 당기려는 정치적인 논쟁이나 한국과 중국 양쪽에 모두 중요한 과거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는 국가보다도 더더욱 유동적인 개념이다. 그의 관점을 빌리자면, 오늘날 한반도의 호모 사피엔스와 중국 대륙의 호모 사피엔스는 과거의 일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그 과거를 한 집단의 성질로 귀속시키려는 시도는 그들의 상상 속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이것에 집착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 된다.

범주화의 관점에서 본 유교적 질서의 한계 4.28

유교와 실리주의

군군신신부부자자.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타파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세계를 제안했다. 인(仁)과 의(義)에 기초해 인간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한 대우법을 예(禮)로 정의한 이 방법론은 큰 파급력을 낳았고,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정치적 질서 달성을 유가의 사상체계로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유교는 형식적 예의 준수, 체제 순응적 윤리 의식, 집단에 대한 의무와 복종 요구 등 상사나 선임 등 권력자의 이익을 우선으로 실현하기 위한 명분 정도이며, 뚜렷한 목표달성을 위한 진지한 고뇌와 탐구 등 현실정치를 위한 학문보다는 조선 중후기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도 경로의존적 현상유지를 위한 명분론으로밖에 기능할 수 없었던 한심한 모습의 연장선이자 잔재에 더 가깝다.

나는 이 상황을 조금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사회에 채택되어 명예를 누리다 자가 편집력을 점차 상실, 권위적으로 변질된 사상은 유교 이외에도 많다. 스콜라주의, 중상주의, 제국주의가 그랬고, 현대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한 이상과 괴리된 현실에서 그 효력을 잃었다. 심지어 민주주의조차 인터넷 매체가 등장하고 확증편향이 심화되며 형식적 명분만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런 맥락에서 유교는 명분론으로 경직된 수많은 사상 중 하나일 뿐이다. 사상이나 이념은 근본적으로 명분론이기 이전에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론이고, 오늘날의 최선책이라고 해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실리적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상 속 유교적 잔재가 의사소통이나 작업 효율화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의 사회문화 현상으로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는 현실과는 별개로 떼어낼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범주화의 부작용

우리는 세상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직관의 힘을 빌려 비슷한 것은 하나의 군으로 묶어 이해한다. 범주화다. 범주화 자체는 유용한 도구지만, 만들어진 범주에 가치판단을 내릴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범주는 개별 존재의 특성과 잠재력을 어느정도 무시하며 형성되기 때문에 현실을 모두 반영하지 않으며 그 단편적인 인상은 오해를 낳는다. 범주화 과정에 대한 자정적 통찰이 부족할 때 인종, 민족, 계층, 성별 등을 기준으로 하는 급진적 분리주의와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이 관점에서 유교의 예(禮)는 우생학과 개념적으로 공통분모가 있고, 같은 이유로 현대 사회에서 한계를 겪는다. 단지 유색인종에 대한 억압과 배제 대신 어린 백성에 대한 도덕적 교화가 자리잡고 있을 뿐 철저한 범주화와 범주에 대한 우열 나누기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다. 만약 전근대 군주의 단령을 벗긴다면 유교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그 사람은 더 이상 군주가 아닌 길거리 노비와 같은 한 명의 인간일 것이다.

범주화의 유용성을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범주의 한계를 인식하고 오해의 소지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불가피하게 범주를 사용할 때는 범주에 대한 가치판단이 낳을 수 있는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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