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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생각 정리: 아비투스 활용법

잠깐의 생각 정리: 아비투스 활용법

다원주의와 일원주의

진영의 우열을 나누고 열등한 쪽을 배제하여 이상을 실현하려는 집단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제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는 다짐으로 국제연합 헌장에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을 명시했고, 이는 다원주의와 정치적 이상주의가 현대 사회의 토대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세계 여러곳에 민주주의 사회가 찾아왔다. 사회는 탈권위화되었고, 일원주의적 사고관은 점차 자연스럽게 후퇴했다. 다양한 행위자를 존중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자는 다원주의는 근대사의 강력한 교훈으로서 일상생활에도 큰 호소력이 있고, 앞으로의 입지도 확고해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글이 하나 있었다. 출저가 어디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예술에 몸을 담는 사람이라면 본인의 분야에 대해 뭐가 나쁘고 뭐가 좋은지 정도는 마땅히 가려낼 줄 알아야 한다”라는 논지였다. 한마디로, 좋은 건 좋은 것이라는 일원주의적 주장이었다. 문제는 설득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에 대한 차이를 애써 무시한다면 더 나은 작품을 발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가치판단의 중요성보다 가능성과 균형을 우선시하는 다원주의는 오판일까?

나는 이 충돌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성질과 환경은 분리되어 있다. 어떤 성질이 가치있는지는 환경이 정하는 것이고, 환경이 변한 정도에 따라 기준 또한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기준은 개인이 놓인 환경을 따른 해석일 뿐이므로 잠재력과 가능성 자체는 넓게 열어둘 필요가 있다. 즉 다원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냄새인지 향기인지

아비투스라는 사회학 용어가 있다. 도리스 메르틴의 저서 제목으로도 유명한 이 개념은 개개인의 세상을 사는 방식과 태도, 또는 무의식적 성향을 의미한다. 아비투스는 집단과 세대를 교차해 타인에게 전승되며, 전승된 아비투스는 그 사람을 정의한다.

사실 이 용어는 사회적 계층에 대한 정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 관점에서 “다리만큼이나 긴 요트를 가졌다고 해서 게르망트 공작 부인의 살롱에 초대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아비투스에 대한 완벽한 요약이기도 하다.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어 벼락부자가 된다 한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난과 촌스러움을 벗어던지고 여유있는 품격을 쟁취할 수 있는지는 또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비투스는 개개인의 태생을 판결하는 잔인한 해석이면서 동시에, 계층이동에 대한 열망을 코를 찌르듯 강렬하게 자극하는 소재다.

아비투스는 충격적이지만 사회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유효하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앞서고 싶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 왕실의 인원으로 자라나지 못한 현실에 아쉬워하거나 열악한 빈민층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을 갖기보다, 지금 나의 아비투스를 점검하고 그 외연을 확장하고 싶다. 까다로운 식사예절, 절박한 생존 전략, 또는 중산층의 평범한 고민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그 집단의 일원이 되는 포용력으로 나중의 급격한 환경변화 속에서도 잘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성취하고 싶다. 이는 앞선 다원주의의 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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