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을 읽고
책 소개
| 항목 | 내용 |
|---|---|
| 제목 |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 |
| 저자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작, 김재홍 옮김, 해설 |
| 출판사 | 민음사 |
| 초판 1쇄 발행일 | 2023년 7월 31일 |
로마 철인황제의 비망록
책 제목은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이지만 널리 명상록(Meditations)으로 알려져 있기에 명상록으로 통일합니다. 사실 원문이 작성된 시점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명상록이라는 브랜드 자체에 경계심이 있었습니다. 먼저 오랜 창작물의 제작 기법이나 소재 자체가 낡아보이듯이 오래된 철학도 현대적 감성과 괴리감이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 있었고, 다음으로 로마 황제가 저술했다는 상징성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비판이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지적 등으로 인한 선입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전에 대한 기대감 딱 하나만으로 책의 첫 페이지를 폈고,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습니다. 우선 재미가 있었습니다. 명상록이 저술된 시기는 고대 그리스의 이성적 유산이 로마 제국에 깊이 뿌리내린 170년경으로, 스토아 철학을 통한 자아성찰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현대인이 스스로 발상하기 어려운 개념으로 구성되어 하나하나 신선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제 생각에 애매모호하다고 느껴지는 부분과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을 몇 군데씩 발견해나가면서도, 기본적으로는 제 마음을 맡기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은 스토아 철학의 관점을 반복해서 드러냅니다. 자연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삶, 인간 일생의 가벼운 무게를 온전히 체감하면서 죽음의 파급력을 의식하는 삶, 지도적 이성에 근거한 로마인으로서의 삶. 그러면서도 겸손하고, 성실하고, 실속있고, 자성적이고, 포용적인 자세를 적용하려 노력합니다. 특히 일상에서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한 소재를 주로 다루면서도 철학적 개성으로 소화합니다. 그 진중함을 따라가는 과정은 역사 교과서의 한 줄로 지나갔을 스토아 학파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았지만, 그 숭고함에서 자성적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감동을 느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으로서 갖게 되는 생각과 2천년 전 로마 황제의 관점간 극명한 간극을 예상치 못하게 느낄 수 있었고, 제가 얼마나 속물적이고 근시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말로 서술하기보다는 다음과 같이 원문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스토아적 통찰
다른 건 다 던져 버리고 그냥 이 몇 가지 것들을 지켜라. 그와 동시에 기억하라. 우리 각자는 오직 현재, 이 한순간에 불과한 현재만을 산다는 것을. 인생의 나머지는 이미 살아 버렸거나 아직 알 수 없는 미래에 속한다.
설령 네가 3천 년을 산다고 해도, 아니 3만 년을 산다고 해도, 여전히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현재 살아 있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잃지 않는다는 것, 또 무엇보다도 지금 잃으려고 하는 삶 이외의 다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긴 일생도 가장 짧은 인생과 같다. 왜냐하면 현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며, 따라서 소멸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잃을 때는 순식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과거나 미래를 잃을 수 없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빼앗길 수 있겠는가.
죽음은 탄생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신비다. 하나는 동일한 원소들의 결합, 다른 하나는 그 원소들로의 <해체>지, 거기에 부끄러운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적 동물에 걸맞지 않은 것이 아니고, 또한 그의 구성 소질(paraskeuḗ)의 원리(logos)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해체>
죽음에 대한 결론까지를 다루는 부분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합니다. 명상록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고, “이 사람은 세상살이에 왜이리 회의적일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 기대에 걸맞는 집착을 보여줍니다. 내용은 주로 ‘죽음을 왜 의식하는가’,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작은가’에 대한 것들이지만, 그 전개가 워낙 노골적이고 구체적이라 여러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한 번쯤 해봤던 생각이 여기서도 발견된다는 반가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결국 이런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는 숙명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그 오랜 역사에서 이 쉬운 요지에 대한 압도적인 반론은 안타깝게도 잘 없었다는 허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르쿠스는 죽음의 공포를 해체하기 위해 두 개의 논거를 연결합니다. 하나, 스토아에서 죽음이 앗아가는 것은 현재에 불과하다는 관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찾아오지 않은 것이므로 둘 다 현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당장 지금만을 앗아가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는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음의 두 번째 관점과 연계됩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죽음은 천둥이나 번개와 동일선상에 놓인 자연현상에 불과하며, 에픽테토스가 주장한 것과 같이 옥수수의 이삭을 거두는 것, 나뭇잎이 지는 것, 무화과가 건무화과가 되는 것, 포도가 건포도가 되는 것 등과 죽음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그것을 불길하게 여기는 것은 일상적으로 매일 일어나는 자연현상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 만큼이나 우스운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인식이 21세기에 옳은가와는 별개로, 정리 자체는 깔끔하고 속시원합니다.
다만, 하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인생 살아 무엇하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등과는 다른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오랜 귀납에 의해 인생사의 허망함을 조명하는 말이라면, 마르쿠스의 견해는 그러므로 더 좋은 일생을 살아야 한다는 연역으로 주지주의에 가깝습니다. 옮긴이는 이를 “마르쿠스가 인간 생명의 짧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견해인 허무주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덕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라고 정리합니다.
만일 네가 너 자신, 즉 너의 정신이 남들이 행하거나 말하는 모든 일, 너 자신이 행했거나 말했던 일을 모조리 떨쳐 버린다면, 또 장래에 네 마음의 평화를 혼란스럽게 할 모든 일, 너를 감싸는 육체 및 그 안에 결부되어 있는 숨을 위해 네 의지와는 무관하게 너와 얽혀 있는 것이나, 또 너의 밖을 둘러싼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린다면, 그 결과 너의 지성은 운명에 좌우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해지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며, 정의를 행하고,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진리를 말하게 된다면 ―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네가 이 지도적 이성으로부터 육체적 욕정에서 유래한 부착물이나 시간 속의 미래 및 과거에 속하는 것들을 떼어 낸다면, 엠페도클레스의 말 ‘둥근 스파이로스(구체, Sphairos) 주변을 에워싸는 고독을 즐기고’ 처럼 너 자신을 만들고,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삶, 다시 말해 현재만을 살아가는 훈련을 철저히 쌓는다면, 그때야말로 너는 죽을 때까지 남겨진 시간을 심란하지 않게, 애정 넘치게, 또 자신의 다이몬과 온화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신이 너에게 ‘너는 내일이나 모레쯤 죽는다’라고 말한다면, 어쨌든 네가 극도로 쩨쩨한 사람이 아니라면, 내일 죽든 모레 죽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간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몇 년 뒤에 죽든 내일 죽든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미래도 과거도 아닌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좀 더 구체화하자면,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우리가 지금 당장 행해야 할 도덕의 실천을 방해하므로 현재에 집중해야 한다는 요지에 가깝습니다. 마르쿠스는 이를 통해 삶의 가치가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결국 삶의 양적인 시간은 운명에 맡기더라도, 그 시간을 대하는 태도와 정신만큼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스토아적 의무를 잘 묘사한 단락입니다.
3년 전에 여러 지인에게 “최고의 인생은 마약을 치사량으로 복용하고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고로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반 농담 반 진담으로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이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 동의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그때 제가 느낀 것은 동의에 대한 안도가 아니라 “다들 인생을 행복을 위한 수단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아함이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명확합니다. 단순히 긴 여생을 보내는 것이 인생의 핵심 과제는 아니라는 전제는 1900년 전 마르쿠스 황제를 포함한 고대인들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의 이 시간을 자신에게 주는 선물로 주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보다는 사후의 명성을 추구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은 다음의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즉 후세 사람들도 현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이며, 역시 죽어야 할 인간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 사람들이 너에 대해 이러한 반향을 나타내거나 너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도대체 너에게 무엇인가.
신선한 충격이 된 문장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은 ‘후세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역사가 두렵지 않느냐’ 따위입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개인적 사견인지 스토아 철학의 관점인지는 모르겠으나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도덕적으로, 업적을 남기며 살아야 한다는 관념 역시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명상록이 얼마나 높은 수위로 작성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명상록을 읽기 이전에 낙관적 허무주의, 견유주의 등에서 비슷한 논지를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지가 이 책에서 반복되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불편한 경험이었습니다. 설령 그들의 말이 맞다고 해도 그렇지 않다고 가정하고 각자의 생을 존중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혹시나 사람의 삶을 과하게 평가절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됩니다.
네가 어떤 외적인 것으로 괴로워한다면 너를 괴롭히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관한 너의 판단이다. 그런데 그 판단을 금세 없애 버리는 것은 너에게 달려 있다. 또 너를 괴롭히는 것이 너 자신의 성격에 있는 그 무엇이라면 너의 믿음을 바로잡는 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 마찬가지로 너에게 건전하다고 생각되는 특정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고통받고 있다면 그렇게 고통받는 대신에 왜 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냐? ‘하지만 제가 이겨 내기 어려운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어요.’ 그렇게 괴로워하지 마라. 그 행동을 하지 못하는 탓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인생을 살 만한 보람이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을 떠나라. 하고 싶은 일을 해내고 죽는 자처럼, 호의의 마음을 갖고, 동시에 장애물에 대해서도 온화한 마음을 갖고 떠나라.
이 삶에서 너의 육신이 굴복하지 않고 있는데, 영혼이 먼저 굴복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다만 자살은 부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요지가 ‘생명은 인간이 지닌 가장 귀중한 것으로, 그것을 스스로 내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는 식의, 우리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생명 중시 사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토아적 관점을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책에서 달아 놓은 주석이 꽤 재미있어서 인용하고 싶습니다. 에픽테토스가 말하길,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네.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아이들보다 더 겁먹지 말고, 아이들이 놀이가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때 ‘나는 더 이상 놀이를 하지 않을래’라고 말해야만 하고, 또 떠나가야만 하네. 허나, 네가 머문다면 신음을 멈춰라”’ 즉, 자살은 기본적으로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합리적인 대안이고 그것에 이상함은 없다는 겁니다.
마르쿠스의 포용적 가치관
남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 습관을 길러라. 그리고 가능한 한 말하는 사람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라.
다른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거나 미워하거나 이와 유사한 감정을 표출할 때, 그들의 영혼을 향해 들어가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보라. 그러면 너는 그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들에 대해 선의를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들을 너의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신들도 꿈이나 신탁을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들의 마음에 두고 있는 것들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인용문의 경우 유난히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을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무조건 수용하라는 게 아니라, 사람은 모두 같은 지성체라는 스토아적 전제로, 아무리 헛소리라 할지라도 우선 그런 의견이 만들어진 경위와 맥락을 자세히 살펴볼 것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생각과 비슷해서 조금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무리 터무니없는 의견이라 할 지언정 그들도 나와 같은 세상을 나와 같은 감각기관으로 인식하고 나와 같은 인지과정으로 해석하는 존재이므로, 그들을 오류로 치부하거나 무시하는 것 보다 동료로 인정하고 설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범죄자가 살인, 강간, 방화, 밀수라는 선택을 하게 된 계기, 정치적 극단주의자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된 원인, 고층 빌딩에서 투신한 사람이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동기 등을 충분히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혐오감이 들 수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인생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충분히 따라가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관점을 실제로 내보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합리적 공감보다는 피곤한 양보로 치부한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행동 원리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어떤 사람의 독특한 성향으로 단정짓고 넘어가려 한다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이는 일상에서 겪는 불쾌감 중 하나였는데, 마르쿠스로부터 조언을 얻은 것 같아 위안이 되었습니다.
황달에 걸린 사람이 꿀을 쓰게 느끼고, 광견병에 걸린 사람은 물을 무서워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인류는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가르치거나 아니면 그들을 견뎌라.
그러나 이런 부분은 비판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는 타인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 이해하라고 했으면서, 여기서는 타인을 병자에 비유하고 ‘가르치거나 견뎌라’로 마무리하는 것은 태도가 다릅니다. 공동체적 의무를 설파한다는 점에서 분명 포용을 말하는 문장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황달에 걸린 사람과 광견병에 걸린 사람을 현실 상황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타인이 나와 다른 의견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을 황달이나 광견병에 걸린 사람으로 치부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세상에 분명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극단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저 말의 요지는 황달, 광견병에 걸린 사람을 향해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것에 있을 것이지만, 이해하려는 태도와 견디려는 태도는 서로 다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통찰
‘모든 것이 자신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라.’ 견유학파 모니모스에게 돌려지는 그 말은 명백하다. 이 말의 핵심적 의미를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말의 효용도 명백하다.
네가 상처받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는다.
불교의 일체유심조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사실, 불교가 아니더라도 고대 사상은 인간이 가진 기준이 결국 허상에 불과함을 일관적으로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최근 크게 체감하는 사실 하나가 있다면 우리는 신체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해석한다는 겁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 그리고 그로부터 느껴지는 만족감과 괴로움은 본질적으로 각자의 가치판단 기준에서 비롯된 주관이며 그 판단 근거는 대개 지엽적인 것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각자의 현실 인식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은 필요합니다. 이 관점에서 본인의 직관이 부정되는 일은 상황에 따라 있어야만 합니다.
역주에 따르면 마르쿠스는 자신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압박을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이 부정하게 쓰이지 않도록, 방해 요인으로부터 빨리 자유로워져서 삶을 안정적으로 누리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괴로움을 느끼기 이전에 본인의 관점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앞서서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지적한 것과 동일한 원리로 발원한 것입니다. 원리야 어땠든, 이런 논지가 2천년도 더 전에 있었던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내가 손해를 봤다’ 라는 의견을 없애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런 느낌도 없어진다. 손해 봤다는 느낌을 없애면 그 손해도 없어지고 만다.
일상의 모든것을 손익계산하려는 현 시대의 한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제압한다는 점에서 통쾌했습니다. 최근의 사회 동향을 보면 협력에 대한 진지한 논의보다는 일을 어떻게 균등하게 분배할 것인가, 무엇을 공평하다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필요한 논의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누군가가 이득을, 손해를 본다는 것은 하나의 인식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소모적인 집착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단락이 손해를 무조건 무시하라거나 그 때 드는 감정, 화와 짜증, 억울함 등을 억제해야만 한다는 의도로 쓰인 것은 아닐 겁니다. 다만 피해의식을 초월하여 사실관계에 기반해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도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에게 좋은 일을 베푼 경우, 자칫 그 은혜를 돌려받으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은근히 상대를 부채자처럼 생각하고 자신이 한 일을 의식하고 있다.
읽을 땐 막상 “당연한 소리를 하네”라며 넘어갔던 문장이었지만 책을 덮고 일상에 복귀하자 이 문장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마다, 그리고 제 선의를 돌려받을 수 있을 때마다 내가 채권자의 위치에 있지는 않음을 조금씩 상기했습니다. 마르쿠스가 지적하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관점입니다. 일방적으로 헌신적인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일이 좋은 일로 남기 위해서는 일방적으로 헌신적이어야 합니다.
서평을 마치며
제가 느낀 마르쿠스는 역설적으로, 그 겸손함만큼이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지만 그런 그가 포용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인간을 이성체와 공동체의 일부로서 존중하고 포용하려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짚고 넘어가려 하고 있고, 이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대립입니다. 명상록은 그 간격 사이 균형을 다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추가로, 표현이 대개 ‘지성’, ‘생각’, ‘능력’, ‘악덕’, ‘가능성’, ‘의지’, ‘저주’, ‘칭찬’, ‘후회’ 등 추상적인 것들 위주로 쓰여 있어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헬라스어로 쓰여진 원문의 어감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왜곡된 부분이 꽤 많을 텐데, 그렇다고 고전 헬라스어를 공부할 수는 없으므로 제가 이해한 의미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좀 아쉬웠습니다. 한편, 책을 덮으면서는 ‘벌써 끝났구나’와 같은, 허무함과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평소 가볍게 생각했던 에피쿠로스와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 인물이 인류사의 무거운 위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의 밀도가 높고 양도 방대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책을 다시 펼쳐보면 좀 더 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성적으로는 주석이 매우 풍부해서 주석을 따라가 맥락을 구체화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옮긴이가 발견한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마르쿠스가 얼마나 일관되게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지 놀랄 수 있습니다. 여담으로, 주석에서 플라톤의 향연,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이 계속 언급이 되는데 책을 고르면서 함께 기억해뒀던 것들입니다. 명상록을 읽으면서 강한 흥미가 돋아서 아마 근시일 내에 구매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 영미권에서의 명칭 ‘Meditations’로부터 유래한 ‘명상록’이라는 관습적 이름 대신 원제 ‘Τὰ εἰς ἑαυτόν’를 존중하여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들’로 번역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