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명 교수가 엮은 노자를 읽고
책 소개
| 항목 | 내용 |
|---|---|
| 제목 | 노자 |
| 저자 | 이석명 역주 |
| 출판사 | 민음사 |
| 초판 1쇄 발행일 | 2020년 7월 10일 |
이 책은 수많은 주해서중 하나
이 책은 도덕경 원본에 대한 주해서입니다. 너무나 먼 옛날 저술된 것이므로 내용 자체는 위키문헌 등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지만, 시적 운율을 살려 의미가 크게 함축되었고 어떻게 내용을 파악하더라도 현대인이 보기엔 괴리감이 드는 부분이 많아 혼자 독해하기에는 큰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민음사 노자는 사실 수많은 주해서, 그리고 그 주해서를 주해한 또다른 주해서 중 하나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 책은 앞선 명상록 서평에서 밝힌 것과 같은 이유에서 기대가 없었는데,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른 방향의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也,非恒道也。名可名也,非恒名也。
고대 한문을 마주하고 있자니 서당에서 공자왈 맹자왈 따라하는 학동이 된 기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니 이것이 맹목적인 숭문주의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고금을 막론하고서도 여전히 유효한 통찰을 확인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느껴졌습니다. 첫 문장,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문장에서부터 등장하는 ‘도(道)’는 37장의 도경, 44장의 덕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도는 형식적으로는 자연적 원리를 가리키는 표현이고, 노자의 말을 따르면 현묘한 그 무언가 정도의 미묘한 어감으로 설명됩니다.
단 한 번 완독했기 때문에 확신할 순 없지만 해설을 읽자마자 강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활동, 프로그래밍이나 그림, 사진, 혹은 다른 활동에 대한 느낌이나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 들 때 한편으로 체감하는 것은 그 원리를 언어로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는 겁니다. 힘들여 근사할 수 있을 뿐 머릿속에 떠오르는 맥락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인수인계를 할 때와 같은 상황에서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잘 안 되지?”라는 말 뒤에 “직접 해보면 알거야.”라는 토가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말하는 이나 듣는 이의 언어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가 가진 한계입니다. 노자는 이런 상황을 “일상적인 도는 도가 아니라는 말(道可道也,非恒道也。)”과 “도를 이름지을 순 있으나 늘 그러한 이름은 아니라는 말(名可名也,非恒名也。)”로 간결히 함축합니다. 언어적 합의는 추상적이고 모호합니다. 어떤 개념을 지칭하는 용어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개념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채 어딘가 불완전한 상태로 놓여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좀 과장이 아닌가 의심이 들다가도 생각을 곱씹어보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사물이나 현상은 본래 아무런 이름도 지니지 않는다. 단지 사람들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부르자고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처럼 약속에 불과한 ‘이름’을 종종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이름으로 사물과 현상을 규정하려 든다. 이름을 통해 사물과 현상의 본래 모습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름은 사물이나 현상 자체를 드러낼 수 없다. 사물이나 현상을 어떤 이름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이름’은 더 이상 그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미추, 선불선의 상대성 이치는 유무, 난이, 장단 등 세상의 다양한 모습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가령 장단의 경우를 보자. ‘길다’와 ‘짧다’는 실체가 없다. 이들은 단독으로 사용되기보다 ‘무엇에 비해 이것이 길다’, 혹은 ‘무엇에 비해 이것이 짧다’라고 비교의 의미로 쓰일 때 의미가 선명해진다. … 세상의 모든 현상과 존재는 항상 그것과 상반되는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불변하는 질서이고 법칙이다.
역주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얼핏 사피엔스의 ‘상상 속의 허구’ 개념과 비슷한 듯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인간의 협력이 가능했다는 결론이 아니라 그로부터 오해가 발생하므로 이것을 털어내고 본질에 집중하자는 자아성찰적 설득으로 이어집니다. 사피엔스를 읽을 때에도 느꼈던 것인데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많지 않습니다. 선험적으로는 알고 있을지라도 일상적 대화에까지 이 발견을 반영하려 하기보다는 내 말이 맞니, 네 말이 맞니를 가르는 경우가 더 자주 보입니다. 사실 그 논의의 첫 번째 성립조건부터가 합의를 망쳐버린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쉬운 일입니다.
이것은 비단 언어적 고찰로서 훌륭할 뿐만이 아니라 최근의 생각과 일치했다는 점에서 반가웠습니다. 5년 전에 혼자 읊조리던 “딱딱한 사고방식이 마냥 정답은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 4년 전에 아주대학교 김경일 심리학과 교수의 강의에서 “명사는 인간이 생각의 양을 줄이려고 만든 독특한 품사”라는 내용을 듣고 머리를 끄덕이던 기억은 앞선 손자병법 서평에서 “실상을 끄집어내는 수준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라는 숫자 의존증에 대한 비판과 만나 다시 노자 도덕경으로 투입되어 작은 확신으로 연결됩니다. 언어와 문자는 분명 압도적으로 유용한 도구지만 전달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실체를 넘어 그 속에 담긴 무형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인위(人爲)에 대한 부정, 비판
六親不和,案有孝慈。 國家昏亂,案有貞臣。
(노자는) 효도와 자애를 거부한다. 자식이 부모를 위하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 자식 간의 당연한 마음이고 정서다. 노자도 이 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런 효도와 자애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유가에서는 자식은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고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았으니 당연히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잘 봉양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 그러나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진정한 효란 부모를 향해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자식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강요된 효, 세뇌된 효는 참된 효가 될 수 없다. … (노자는) 충신을 거부한다. ‘정신(貞臣)’은 흔히 말하는 충신이다. 충신이 많은 국가는 안정된 국가인가? … 충신이 많은 시대일수록 세상은 어지러웠다는 의미다. 세상 사람들은 충신들이 보여 주었던 그 희생정신과 충성심을 기리는데 몰두하지만, 노자는 그 역사적 이면에 깔려 있는 국가의 혼란상에 주목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수많은 충신을 기리기보다는, 충신이 나오지 않는 안정된 세상에서 모두 평화롭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이 부분은 도덕경이 지닌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잘못 들으면 말장난인 듯 싶다가도 앞선 미추, 선불선의 상대성이 엮인 담론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충효라는 개념 자체가 그것이 부재한 세상을 전제로 성립한다는 역설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이 부분의 골자는 작위적인 가치 숭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노자는 인위(人爲)가 진정한 도덕보다 형식에 치중하게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만약 이 비판을 “좋은 게 좋은 거지”라며 묻어버린다면, 그건 노자의 관점에서 곧 작위적 가치체계를 간파하지 못한 것이자 도(道)와 동떨어진 허상을 좇는 행위가 됩니다. 저 멀리 지구 반대편의 견유주의 학파가 강하게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다만, 내용은 이해가 되는데 너무 이상적인 접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계의 전쟁사를 보면 갈등은 필연적이고, 도가사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기에는 너무 어려워 보입니다. 노자는 애당초 정신(貞臣)이 필요 없도록 상황을 잘 관리하라고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 일어납니다. 제자백가를 떠나 동시기 많은 사상이 그래왔듯 노자 역시 인간 이성을 과신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이 점은 뒤에서 도가 특유의 정치철학으로 구체화되는데, 밑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上義為之,而有以為也。上禮為之,而莫之應也,則攘臂而仍之。
인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라면, 의는 인의 그런 자연스러운 유출이 방해받지 않도록 외재적인 환경과 조건을 규제해 안과 밖, 나와 남, 행위와 일 등 모든 사회적 관계를 서로 알맞게 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의의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내면의 심성적 자율보다 외부적 규범을 더 중시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 실천에는 뚜렷한 방향성과 목적이 있다. 그것은 곧 관계의 조화와 사회 질서의 확립이다. … 인과 의의 단계까지는 어느 정도 인간의 자율성이 작용한다. 그러나 예의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강압적 규제의 대상이 된다. 전통 사회에서 누군가 예를 따르지 않으면 그는 곧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사회적 존재임을 자인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철저한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예는 인간의 행위를 바로잡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지만, 이때는 이미 인간이 자존과 자율을 모두 상실하고 법망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제당하는 처지로 전락한 뒤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자가 “예라는 것은 충(忠)과 신(信)이 얇아진 증거이고 어지러움의 시초이다”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 해설은 책에서 가장 감탄했던 부분입니다. 오랫동안 유교는 동아시아 질서의 근간을 담당해 왔습니다. 특히 동아시아사를 살펴보면 개화기를 거쳐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도 유교사상은 사회질서의 암묵적 전제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제 부모, 조부모님께서도 남녀와 부모자식간의 위계를 엄격히는 아니더라도 부드럽게 언급하시곤 했고,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께서 지금도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조상 묘 앞에서 술을 따르고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일련의 문화적 파이프라인을 따르지 않는 것 자체가 못 배운 것 또는 부정한 것, 적어도 어색한 것으로 느껴질 만큼 유교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유교 문화에서 쓴 뒷맛을 느껴왔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같이 제사에 가자고 하시면서도 왜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으셨습니다. 조상을 기리는 것이 왜 산소에서 술을 따르고 절을 하는 행위로만 이어져야 하는 것인지, 이 분들께서는 평소에도 유교적 가르침을 실천하시는 것인지, 사례편람이나 예기 등 명확한 출처를 따로 갖고 계시는 것인지 등의 의문이 있었지만 쉽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검은 양말과 와이셔츠 차림의 어른 여럿이 병풍 앞에서 절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또 나중에는 따라해야 한다는 것이, 저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제사는 전통적인 것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전통이라는 것은 의미는 퇴색되고 형태만 남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노자는 정확히 이 지점을 비판합니다. 인위에 대한 지양, 유가와의 직접 경쟁. 처음에는 대담하다고만 생각했으나 형식이 본질을 압도할 때의 기괴함을 지적하는 부분을 읽고 놀랐습니다. 그 요지는 제가 느꼈던 불편함을 잘 설명합니다. 만약 효도와 제사가 시간과 규율이 정해지지 않은 즉흥적인 것이었다면, 그 메시지가 ‘정말 어려운 시대를 사시던 분이셨다’, ‘어렸을 때 웃으면서 떡 한 번 떼어 주셨던 모습이 그립고 다시 보고 싶다’와 같이 인간 본성으로부터 연결된 것이었다면 그 정서는 제게도 있는것이니만큼 의문도 불편함도 없었을 겁니다.
노자가 그린 이상적인 통치론
노자 철학에서 도를 잡은 군주는 무위 정치를 실행한다. 무위 정치는 백성의 자발성을 존중하므로 가능한 한 명령하거나 지시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따라서 국가 지도자가 이 도를 잡고 무위 정치를 하면 백성들은 굳이 명령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고 질서를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지도자들은 대개 획일화된 가치나 기준을 제시하고 모든 백성에게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라고 요구한다. 백성 각자가 지닌 다양한 특성과 성격은 고려하지 않은 채 지배층의 이익과 욕구에 합당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 백성들에게 거기에 따르고 복종하길 강요한다. … 지도자가 잔머리를 굴리고 욕심을 부리면 백성들 또한 그러한 지도자를 모방하여 잔꾀를 부리고 욕망을 키워 간다. 이런 식으로 위아래가 서로 ‘지(知)’를 좇고 ‘욕망(欲)’을 쌓아 가면 결국 온 나라가 파멸의 길로 가고 말 것이다.
언어의 한계와 형식적 가치에 대한 노자의 비판은 특유의 정치론으로 이어집니다. 핵심은 개개인의 자율성을 좋게는 존중, 그디고 적어도 이용하라는 겁니다. 사실 꽤 멋진 말입니다. 노자는 군주란 백성에게 획일적 가치를 강제하는 자가 아니라 각자의 자율성이 발현될 수 있는 원칙을 합의하는 자여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사회 조직을 위계의 산물이 아니라 균등한 공동체이자 하나의 생태계로 바라볼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관점입니다. 현대사회에서 본인의 직급에 장(長) 자가 있는 사람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탑다운 방식을 바람직한 일처리 형식으로 여기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지혜를 단절하라는 요지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잔꾀술수를 멀리하라는 경고인가, 하고 완곡히 이해하려 했으나, 정말 우리가 아는 학문과 학술 전반을 포함하는 개념인 것을 확인하고 많이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마 도덕경이 저술된 시기가 지식의 힘을 좀처럼 체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나라의 실체가 건재하던 기원전 5세기는 종이조차 발명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만약 저작가가 오늘날의 인쇄술과 나침반, 토목공학과 전자공학의 산물을 보았다면, 그리고 그것들을 활용하는 현대 지성의 성숙함을 확인했다면 조금 다른 의견을 내보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서평을 마치며
코드 작성 경험과 연관하여 프로그램 구조를 설계할 때의 감각과 어떤 익숙함을 느꼈는데 그 내용이 재미있어 따로 특기하고 싶습니다. 객체 지향적 프로그램을 작성할 때 중요한 것은 사물의 개념적 대상화입니다. 전통적인 절차 지향적 명령줄이 코드 설계자의 직접 명령과 지시가 명시된 것이라면, 객체 지향적 명령줄은 각자의 자발성을 존중하여 큰 상호작용 흐름도를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아무리 그렇다 한들 도(道)를 엄격히 구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머릿 속에서 잡혀 있는 원리원칙을 정리해서 데이터 흐름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유사합니다.
책의 구성적 특징으로 원문에 대한 해석 말고도 여러 판본의 내용을 자세히 비교하고 넘어간다는 점이 있습니다. 원본으로부터 진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곡된 필사본이 지닌 역사적 위상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이나 불경이 여러 판본으로 존재하는 격이니 도덕경을 최대한 중립적으로 서술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루지 않고 넘어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전반적으로 독자에게 한문 독해능력을 기대한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엮은이가 해설한 부분도 어느정도 그렇지만, 특히 판본 비교 부분은 정말 순수하게 한자 한 자 한 자를 비교해서 의도와 의미를 비교하기 때문에 한문에 익숙하지 않다면 당황스러울 수 있고, 또 불필요할 수 있습니다. 이 분량이 보통 한 챕터의 반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하므로 독서 호흡을 조절하여 빠르게 읽어낼 수 있습니다.
